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혐오와 수치심 (문단 편집) === 혐오와 수치심? ===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다음의 진술들을 읽어 보자. || * 저는 게이가 혐오스럽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어떤 남자가 제게 느끼한 시선을 보내기에, 구역질이 나고 혐오감을 느껴서 그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살인은 잘못이지만, 제 혐오감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참작해 주십시오. * 동성애 성향을 우리 사회가 하루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세상의 기본적인 질서가 사라지고 성 도덕이 붕괴될 것입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이라니 이게 웬 말입니까? * 여성의 몸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노출시켜서 전시하다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운 음란물이네요. 저런 구역질 나는 매체는 당장 법으로 검열해야 하지 않나요? * 성매매 남성의 명단을 정부 사이트에 게시하고, 음주운전자의 차량에는 적발 사실을 알리는 스티커를 의무적으로 부착한다면, 창피해서 누가 감히 죄를 지으려 하겠습니까? * 요즘 세상은 죄를 짓고도 수치스러운 줄을 모르는 세상이니, 우리 사회의 규범과 질서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수치심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 미리 언급하자면, 저자는 위의 진술들에 대해서 (조금은 놀랍게도) '''전부 반대한다.''' 법학자로서 저자는 위와 같은 사례들을 혐오와 수치심이 법리 판단이나 판결 과정에서 부적절하게 영향을 끼쳐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혐오라는 정동이나 수치심이라는 정동이나 법의 정신의 입장에서는 전혀 믿을 만하지 못한 것들이며, 도리어 [[자유주의]]적으로 보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이들이 법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본다. 위의 사례 중에 일부가 다소 설득력이 있어 보이더라도,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굳이 혐오와 수치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이미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어서이며, 그런 사안을 혐오와 수치심에 입각해서 판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판례가 된다. 저자는 서문과 1장에서 먼저, 일반인들이 흔히 통속적으로 오해할 만한 생각을 바로잡는다. 즉, '법에는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 감정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법적 판단에서는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법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법은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 법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의 감정 상태를 고려한다"(p.22). 단지, 법의 정신에서 보기에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동이 있고, 좀 더 신뢰할 수 없는 정동이 있을 뿐이다. 정동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합리적 사고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법이 전제하는 '''합리적 인간'''(reasonable man)은 명백히 정동을 경험하는 인간이다. 예컨대, 눈 앞에서 가족을 해친 범죄자를 보고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감정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 롤스]](J.Rawls)의 논변을 통해서 [[자유주의]]적으로도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여기서 어떻게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정동과 신뢰할 수 없는 정동을 구분하는가? 이 지점에서 저자는 '''정서심리학'''계의 문헌들을 토대로 하여, 각 정동의 근저에 기초한 인지적(cognitive)인 사고의 과정을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혐오가 믿을 수 없는 정동이라는 논리가 세워진다. 여기서 먼저 '''혐오의 인지적 구성요소'''들을 살펴보자. 혐오는 흔히 구토로 표현되며, 폴 로진(P.Rozin)의 정의에 따르면 '''오염물이 [[입]]을 통해 체내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혐오는 늘 입과 연결되어 작동하는 정동이다. 지독하게 낡고 더러운 [[공중화장실]]에 들어갔다고 가정했을 때, 더러운 벽에 손가락을 문지르는 것, 심호흡을 하면서 구린내를 들이마시는 것, 그저 입을 살짝 벌리기만 하는 것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독 입을 벌리는 것을 가장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다. 더러운 걸레를 집어올리는 사람들이 불필요하게도 이를 악물고 들어올리는 것도 하나의 예시. 입은 '더러운 것' 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통로라는 본성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혐오의 심리적 특징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현대에 이 주제로 연구하는 주요 심리학자들로는 (본서에서는 소개하고 있지 않으나) 요엘 인바(Y.Inbar), 데이비드 피자로(D.Pizarro), 그리고 폴 블룸(P.Bloom) 등이 있다.] * 혐오는 '''개인이 어떤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나타난다. 예컨대, 어떤 시험관 속에 치즈 조각이 들어있다고 안내받은 사람들은 그 냄새를 좋아하지만, 똑같은 냄새일지라도 시험관 속에 대변 덩어리가 들어있다고 안내받은 사람들은 그 냄새를 극혐할 수 있다. * 혐오는 '''관념적으로 유지되는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바퀴벌레]]를 건조시켜서 고운 가루로 분쇄한 것을 바퀴벌레 혐오자에게 보여준다면, 그 사람은 그것이 여전히 바퀴벌레라고 여기고 혐오스러워한다. * 혐오는 '''그 대상이 얼마나 위험한지에는 무관하다.''' 예컨대, 완벽하게 소화 불가능함이 입증된 플라스틱 밀봉 캡슐에 독극물을 넣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입에 넣고 삼키려 하지 않는다. * 혐오는 '''그 대상이 얼마나 정상적인지에도 무관하다.''' 예컨대, 완벽하게 잘 소화되고 아무런 의학적 소견이 없는 단단한 황금빛 대변의 경우, 그것은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정상인의 배설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 혐오는 '''똑같은 대상이더라도 몸 안에 있다가 몸 밖으로 나가면 적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항상 침을 삼키고 있지만, 접시 위에 침을 뱉어 놓고 그것을 다시 핥아먹으려 하면 거북한 느낌을 받게 된다. * 혐오는 '''일단 한번 어떤 대상에 그 속성이 부여되면 제거되기 어렵다.''' 예컨대, 일단 한 차례 개의 소변을 받았던 컵은 그 이후 아무리 세제로 빡빡 문질러 씻어도 혐오스러우며, 곧바로 그 컵에 사과주스를 담아 마시기는 쉽지 않다. * 혐오는 '''그 외형적 유사성을 따라 전염된다.''' 예컨대, 대변 모양으로 공들여 빚은 [[초코파이]]를 접하게 되면, 설령 그것이 초코파이였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입에 넣는 동안 계속 거북한 느낌을 받는다. * 혐오는 '''문명의 발전과 선형적 관련성이 없다.''' 비록 노베르트 엘리아스(N.Elias)는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생리적이고 위생적인 혐오 관념이 많아진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컨대, 고대 로마의 발전된 상하수도 문화와 화장실 기술, 평균적인 청결 수준을 근대 영국의 궁정 생활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으며, 목욕 문화는 현대에서야 시작되었기 때문. * 혐오의 대상은 '''문화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 같은 현대사회라고 할지라도 문화권이 다르다면 저마다 혐오를 느끼는 지점이 다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농장에서 일하고 온 그 신발 그대로 자기 침대 위에 올라가는 것을 극혐하지만,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감자칩을 한 입 베어먹은 후 그걸 소스에 다시 찍어먹는 '더블딥' 행동이 매우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발견들을 통해서, 심리학자들은 혐오의 핵심적 의미를 발견했다. 혐오는 '''몸 밖의 유해하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정동''', 특히 동물의 분비물이나 체액, 부산물, 배설물, 더 나아가 시체나 음식의 부패까지 막으려는 정동이다. 즉 혐오의 핵심은 '''취약성을 가진 무언가가 입을 통해 들어오면 자기 자신까지 존엄을 잃고 취약해진다는 느낌'''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혐오는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와 관련이 있다"(p.168). 여기서 동물성에 관련된 모든 것이 다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것이 취약성에 결부되었을 때 비로소 혐오스러워진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발달심리학자들은 발달 과정에서 혐오가 서서히 나타나며, 나이가 들수록 점점 혐오의 대상이 많아지고 강도도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혐오는 "[[사회화|사회적 교육의 강력한 전달 수단이다]]"(p.182). 구체적으로 '무엇' 에 대한 혐오인지는 '''사회가 가르치게 되는 영역'''이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이미 외집단에 대한 혐오를 또래 놀이 중에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의 근저에는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씩은 갖고 있는 '''[[나르시시즘]]''', 즉 개인의 자아가 완전무결하고, 완벽하고, 초월적이고, 고결하며, 신성하고, 독립적이고, 침입 불가능하다는 (그리고 적어도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완전성을 위협하고 깨뜨릴 수 있는 오염물이 나타난다면 그것에 대해 자아의 내부에서 '추방시키는' 급격한 반응이 나타난다. [[불편한 진실|내 자신이 어쩌면 결점이 있고, 덜떨어지고, 범속하고, 부정하며, 불경하고, 의존적이며, 침탈당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아내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히스테릭하게 거부하면서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기확신을 하는 과정이 바로 혐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반문한다. 그런 자아상이 과연 현실적인 것인가? 밑도끝도 없는 나르시시즘에 왜 사법 체계가 부응해 줘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그런 나르시시즘이 다른 선량한 시민들을 혐오해야만 달성될 수 있다면, 정말로 왜 사법 체계가 부응해 줘야 하는가?''' 법의 정신이 그런 혐오자들에게 대답할 길은 하나뿐이다. "그래요, 당신은 그런 자아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왜 그것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다른 시민]]의 자유가 침해되어야 합니까?" 저자는 혐오가 '''[[사회적 소수자|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문헌 속에서 '추정상의 상해' 라는 개념을 말했는데, 이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그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해롭다는 느낌을 받거나, 그 존재가 앞으로 하게 될 해로운 행위를 추정하거나, 그 존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 집단이 인간의 취약함과 불완전성, 의존성을 상기시킨다면, 그 존재는 일종의 오염물처럼 여겨지게 되어 밀이 말했던 '추정상의 상해' 의 느낌을 줄 수 있다. 그 집단으로 인하여 개인의 자아가,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와 내집단이 오염되고 취약해지며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호모포비아|반동성애]]'''라고 볼 수 있다. 게이들로부터 헤테로 남성들은 [[청년막|자신의 육체적 깨끗함]]을 잃어버리고 분비물과 오염물로 얼룩지게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극단적으로는 단순히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침범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게이 혐오자들은 법정으로 몰려가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해 달라', '게이는 때려도 무죄로 해 달라', '게이는 잘못됐다고 말하는 걸 허용해 달라' 같은 요구들을 늘어놓게 된다. 자신의 혐오를 사법 체계가 뒷받침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한 사람을 지구상에서 없애려는 소망" 이며 "이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거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이상 p.533)일 뿐이다. 혐오가 소수자들을 공동체에서 배척하고 은폐시키는 메커니즘은 꼭 법의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는 법 이외에도 도덕이나 관습, 규범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불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문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암묵적이고 규범적으로 작동하는 '''정상성''' 혹은 '''규범성'''(normativity)이다. 이러이러한 사람들은 정상이고, 이 허들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부 비정상으로 싸잡아 버리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비정상이라며 손가락질하는 혐오를 통해, 사람들은 '''"따라서 나는 다행히 정상이야" 라는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못난 존재일 수 있다는 무서운 현실로부터 보호 받는다. 꼭 소수자 담론만은 아니지만, 이는 소위 '○○이면 [[인싸]]' 같은 사회적 메시지에 겹쳐 보면 이해가 쉽다. 예컨대, [[혼밥]]러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언뜻 인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아싸라고 손가락질당할까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정상성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자극을 덮어 주는 대리 자궁과 같은 역할"(p.399)과도 같다. 가장 대표적인 정상성 중 하나가 바로 '''정상가족'''(normal family), 즉 동일한 문화권 속의 시스헤테로 남녀가 만나서 시스헤테로 자녀를 낳고, 남편은 공적인 곳에서 생계를 부양하고 아내는 사적인 곳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가족이다. 이런 가족만을 정상이라고 취급하게 되면, [[편부모 가족|편부모가정]], [[소년소녀가장]],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동성결혼]]에 기초한 [[시민결합]], [[동거]] 관계의 남녀, 이혼가정, 재혼가정 등이 죄다 비정상이 되어 버린다. 또 다른 정상성으로는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이 있다. 이것은 이성애야말로 [[자연의 섭리]]이며 동성애는 뭔가 치료를 요하는 병리적인 상태라는 규범적 압력이다. 물론 이런 기준 하나하나만 보면 정상인 쪽이 다수이고 비정상인 쪽이 소수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상성의 기준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면에서 빠짐없이 정상인 사람들이 거의 없게 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수많은 정상성의 기준들을 전부 충족하진 못한다.''' 남자다움의 압력이 확고한 [[미국인]]들 중에도 정작 [[패권적 남성성]]을 지닌 완벽한 남성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과도 상통한다. 본서에서는 '''[[여성혐오]]''' 또한 함께 논의된다. 혐오에 대한 정서심리학 도서 《The Anatomy of Disgust》 를 저술한 윌리엄 밀러(W.I.Miller)는, 여성의 육체가 남성들에게는 취약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성의 존재로 여겨지며, 특히 남성의 정액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혐오반응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물론 헤테로 남성은 여성의 신체에 성적으로 이끌리지만, 그렇다고 혐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적 이끌림과 혐오감은 양립 가능하며, 도리어 서로에게 섞여들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언급한 [[음란물]]에 대한 논의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4장에서 저자가 논의하는 바에 따르면, '''성적인 흥분과 혐오스러운 느낌은 심지어 법적으로도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법률적 수수께끼"(p.252)라고 불렀다. 저자에 따르면 법정에서 음란물이나 각종 도착증, 변태성욕에 관련된 이슈가 사건으로 접수될 때마다 흔히 '저런 성적인 건 우리 사회에 혐오스러우니 제작자를 처벌하고 규제해 달라' 는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저자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원칙적으로는 [[에로티시즘]]만을 포함해야 하지만 (밀러의 논의를 따라) 현실적으로는 혐오감까지 함께 뒤섞여 있음을 주장한다. 원래, 성적으로 노골적인 것은 꼭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질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정치적 관점이나 신앙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정도의 사회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신체에서 '''에로티시즘과 혐오감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데 분리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월트 휘트먼]](W.Whitman)의 시 〈I Sing the Body Electric〉 이 여성의 몸을 시적으로 묘사했음에도 구역질난다며 세간에 논란이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마찬가지로, 음란물이 외설적이니 검열해 달라고 법정에서 호소하는 것도 음란물이 여성의 신체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혐오스러운 이유는 여성의 신체가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가 섹스 이외의 상황에서 공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자는 [[보수주의]] 및 도덕주의적인 '''음란물 검열론에 반대한다.''' 음란물 검열론 자체가 여성의 신체를 혐오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성혐오]]적 문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에 익숙하다면 아마도 《[[포르노그래피]]》 의 저자인 안드레아 드워킨(A.R.Dworkin) 및 [[캐서린 맥키넌]](C.A.MacKinnon)을 떠올릴 수 있다. 저자 역시 본서에서 이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활동 목적이 음란물의 전면 규제라기보다는 음란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이 음란물 제작자를 가해자로 고소할 수 있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어떤 비현실적인 하드코어 포르노를 본 남성이 자기 아내를 대상으로 그것을 재현하려는 통에 아내가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 이 아내는 하드코어 포르노를 제작한 사람을 가해자로 고소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음란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 중에는 음란물 출연 여배우 역시 포함되며, 실제로 드워킨-맥키넌 그룹은 이들의 인권을 적극 강조한다.] 음란물 자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적 창작물과 같이 취급해야 하지만, 그 제작을 규제해야 할지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많은 법적 논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나르시시즘과 정상성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나르시시즘은 개인이 자신의 취약성을 거부하고 완전성을 주장하게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을 잠재적으로 취약하게 하리라 추정되는 오염물을 혐오하게 만든다. 이러한 혐오의 규범은 사회적으로 '이러이러하지 못하면 비정상' 이라는 인식을 따라 작동한다. 그런데 만일, '''다른 시민들에 의해서 내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도 [[성적 지향]]이나 [[장애인|신체적 장애]], [[트랜스젠더]], 비만한 사람처럼 명백히 자신 쪽이 비정상이어서 왜 자신이 혐오받는지 아는 경우에는 그나마 항의할 수조차 없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비정상성과 취약성에 마주하여 경험하게 되는 정동이 바로 '''[[수치심]]'''이다. 정상성의 허들이 높고 혐오의 분위기가 강할수록 수치심도 커진다. 예컨대 사춘기 소녀들은 코의 높이, 턱선, 피부의 색과 톤, 머릿결, 어깨의 크기, 체지방량 등등 수많은 요구조건에 자신의 몸이 부합하지 못할수록 큰 수치심을 느끼며, 이는 [[섭식장애]]를 유발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실업자들과 구직자들은 '방구석 백수' 이미지가 강한 사회일수록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수치스러워한다. 수치심에 대해 저자는 [[정신분석학]]의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을 많은 페이지에 걸쳐 할애하면서 주장하면서도, 가급적이면 존 보울비(J.Bowlby)의 애착 이론처럼 이후의 과학적인 현대심리학에서도 [[교차검증]]이 되는 내용들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논리를 요약하자면, 수치심은 유아가 양육자의 도움 없이는 전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정동으로, 특히나 [[자존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이상을 품기 시작'''하는 나이에 특히 강하게 발달한다. 부모나 선생님처럼 중요한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 호감을 얻고, 긍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할 때, 어린이들은 수치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심은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p.338). 저자는 이러한 유아적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 채워지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 이라고 특정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이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도달할 수 없는 완전성과 초월성' 이 될 수도 있고, 이 경우에 원초적 수치심이 발생하게 되지만, 꼭 그런 도달불능의 목표가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던 어느 정도의 상태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수치심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대의 기준은 '''도덕과 성품, 인격, 자아 등의 본질적인 부분'''에 관련된 것이기에,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쓸모없고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